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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난다, 자기 희생의 이야기 - 인도문명과 불교(2-1)

 류현정 교수 / 힌두교와 불교를 넘나든 보살 이야기 / 2024


힌두와 불교의 조화

붓다의 이미지는 단순히 종교적 상징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거쳐 전승되며 변용되고, 각 지역에서 독특한 서사와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킨다. 이러한 이미지의 전승은 단순히 종교적 영향력만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과 공동체의 가치를 반영하며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되고 확장된다. 오늘 다룰 주제는 이 서사의 전승과 변용 과정을 살피며, 특히 나가난다라는 작품에 담긴 자기 희생과 이타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보려 한다. 이 작품은 힌두교와 불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두 종교의 특성을 동시에 담아낸 독특한 희곡으로, 작가 하르샤 바르다나 왕의 의도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먼저, 하르샤 바르다나는 7세기 인도의 왕으로, 굽타 왕조의 쇠퇴 이후 형성된 여러 소국 가운데 푸샤부띠 왕조의 통치자였다. 그의 통치 지역은 현재의 동북 인도, 겐지스강 유역을 포함하며, 당시 중천축국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며 통합적 통치 철학을 실현하고자 했던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하르샤의 이름 "하르샤"는 환희나 황홀감을 의미하고, "바르다나"는 확장을 뜻한다. 이는 통치자의 이름에 머무르지 않고, 그의 작품 나가난다에서 주인공이 겪는 극적 희생과 그로 인해 확장되는 공동체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하르샤는 자신의 이름을 통해, 개인적 환희와 사회적 확장이 긴밀히 연결된 이상적인 인간상을 구현하고자 했음을 암시한다. 이는 그의 통치와 작품에서 드러나는 포용과 확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불교와 힌두교를 아우르며 두 종교의 조화를 모색했으며, 이러한 철학은 그의 작품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하르샤의 대표작 나가난다는 힌두교와 불교의 전설을 기반으로 하여 자기 희생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은 힌두교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불교 설화가 혼합된 이야기 구조다. "지무 마하나라카" 설화는 힌두교와 불교 모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하르샤는 이를 재해석하여 불교적 가치를 강조했다. 특히, 이타행을 통한 자기 희생은 붓다의 가르침과도 밀접하게 연결되며, 이는 당대의 인도 사회에서 널리 존중받는 이상적 인간상과도 맞닿아 있다.

나가난다의 배경과 서사는 현장 스님이 기록한 대당서역기에도 언급된다. 예를 들어, 현장은 하르샤가 국가의 안정과 문화적 융성을 위해 불교를 진흥한 점을 강조하며, 그의 통치가 인도 북부 지역에서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사례를 기록했다. 또한, 하르샤가 겐지스강 유역에서 대규모 불교 행사를 개최하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직접 교류한 모습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하르샤를 단순한 군주로만 보지 않고, 이상적 지도자로 평가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현장은 하르샤를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그의 통치와 문화적 업적을 상세히 기록했다. 예를 들어, 하르샤의 수도였던 "공녀이자"라는 명칭은 그 연원이 독특하다. 이 명칭은 "굽은 여인"을 의미하며, 전설에 따르면 한 선인이 명상 도중 나무와 새를 몸에 얹고도 해치지 않았다는 자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이 선인이 왕의 딸들과 얽힌 사건에서 분노하여 저주를 내린 결과, "굽은 여인들의 도시"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화도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선인들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반영한다. 또한, 이 이야기는 당대의 도덕적 가치와 이상적 행동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하르샤의 작품이 독특한 이유는 힌두교와 불교를 넘나드는 외줄타기 같은 균형감각에 있다. 그는 두 종교의 상반된 요소를 조화롭게 결합하여, 하나의 통합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특히, 자기 희생을 통한 이타행은 불교적 가치로 강조되지만, 그 근간에는 힌두교적 신화와 영웅 서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조합은 하르샤가 단순히 종교적 경계를 허물고자 한 것이 아니라, 두 문화의 공통된 인간적 가치를 탐구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통치 철학은 종교적 관용과 공감에 기반하며, 이는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나가난다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작품의 핵심 설화와 다른 전설적 이야기들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동일한 설화가 힌두교 서사에서는 영웅적 희생으로 그려지지만, 하르샤의 나가난다에서는 이타행을 통한 불교적 이상으로 변형된다. 힌두교 서사에서는 영웅이 자신의 가족이나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개인적 희생이 강조된다. 예컨대, 마하바라타의 주인공들은 명예와 의무를 위해 희생하며 그 결과로 신들의 축복을 받는다. 반면, 하르샤의 나가난다는 이러한 서사를 불교적 맥락으로 변형하여, 개인적 명예보다 타인을 위한 자비와 헌신이 중심이 된다. 주인공의 희생은 특정 집단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해탈을 목표로 하며, 이는 불교의 보살 이상과 연결된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사회에서 요구된 종교적 메시지와도 맞물려, 두 종교 간의 공통 가치를 드러내는 동시에 불교적 철학을 강조한다. 이러한 변용은 단순한 재해석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맥락을 반영한 창조적 행위였다. 특히, 당시 인도의 종교적 분열과 통합의 필요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변형은 단순히 문학적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와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이 불교적 이타행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방식도 흥미롭다. 주인공의 자기 희생은 단순히 개인적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공동체 전체의 안녕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모든 중생을 위한 자비"를 극적으로 형상화하며, 개인적 이익보다 공동체의 행복과 구원을 우선시하는 이상을 뚜렷이 드러낸다. 하르샤는 이러한 서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적 선함을 강조하며, 당대의 독자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동시에 전달하려 했다. 예컨대, 주인공의 행동은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는 선택으로 묘사되며, 이는 불교적 가르침의 핵심인 "모든 존재를 위한 자비"를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하르샤가 창조한 이 세계는 단순한 종교적 배경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과 윤리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나가난다는 종교적 서사와 철학적 통찰을 결합하여, 인간 내면의 가능성과 도덕적 이상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하르샤 바르다나, 이 이름은 인도 역사에서 빛나는 하나의 별과도 같다. 그의 통치는 단순한 왕조의 기록을 넘어, 시대의 종교와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회로 작용했다. 하르샤의 이름 앞에 붙는 슈리(Sri), 데바라(Devara) 같은 존칭은 그의 위엄과 신성성을 강조하며, 슈리는 '빛나는' 또는 '영광스러운'이라는 뜻으로 인도에서 신성한 존재나 존경받는 인물에게 붙이는 명칭이다. 데바라는 '신의 아들' 또는 '신성한 존재'를 의미하며, 이는 그의 통치가 신적 정당성을 갖추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호칭들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그의 별칭 ‘쉴라 아디티야’는 태양신과 연관된 신화적 색채를 띤다. 쉴라는 행동과 기질을, 아디티야는 태양신을 뜻하며, 이는 하르샤의 통치 철학에 깊은 상징성을 부여한다. 쉴라는 그의 통치가 인간의 윤리적 행위와 강인한 지도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아디티야는 태양신의 빛과 같은 왕의 역할, 즉 모든 백성을 비추는 자비롭고 포용적인 통치자의 이상을 표현한다. 이를 통해 하르샤의 통치 철학과 영적 기반을 엿볼 수 있다. 이 별칭은 단순한 칭호가 아니라 그의 정치를 종교적 정당성 위에 올려놓은 상징으로 작용했다. 대당서역기에서는 하르샤를 ‘개일(開一)’이라 칭하며, 그를 불교의 이상적 군주로 묘사한다. 이는 하르샤의 정책이 불교와 힌두교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려 했음을 암시하며, 그의 다채로운 통치 철학을 보여준다.

하르샤의 통치는 비극적 가족사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아버지 라바카 바르다나와 형 라지아 바르다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하르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비극은 단순히 가족의 상실에 그치지 않고, 하르샤로 하여금 왕위 계승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받아들이게 했다. 신하들은 그의 덕망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하르샤는 자신이 왕으로서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고 여겼다. 이는 그가 겐지스 강가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며 자신의 통치에 대해 신중히 성찰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 경험은 하르샤의 통치 철학에 인간적 고뇌와 종교적 신념이 녹아들게 하였으며, 그의 정책에서 자비와 관용의 정신이 두드러지게 발현된 배경이 되었다. 그는 겐지스 강가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며 자신의 왕위 계승이 옳은지 답을 구했고, 관세음보살의 현현과 조언은 하르샤에게 신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그의 통치를 영적으로 뒷받침했다.

하르샤의 통치는 복잡한 종교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까야 지역에서는 브라만교의 신들이 널리 숭배되었으며, 비슈누, 쉬바, 수리아가 특히 인기를 끌었다. 비슈누는 우주를 유지하는 신으로, 그의 아홉 번째 화신이 붓다로 여겨지는 독특한 종교적 융합을 보여주었다. 쉬바는 파괴와 재생의 신으로, 탄트라적 요소와 연관되어 당시 사람들의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태양신 수리아는 일곱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탄 모습으로 묘사되며, 시간과 우주의 운행을 상징했다.

이 시기의 종교적 혼합은 하르샤의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불교에 기반한 자비와 관용의 통치를 표방하면서도 브라만교와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궁정 시인 바나(Bana)는 하르샤의 업적과 삶을 기록한 하르샤짜리타(Harshacharita)에서 하르샤의 종교적 포용성을 상세히 묘사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하르샤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쉬바를 숭배했지만 그의 통치 아래 다양한 종교가 공존할 수 있었다.

대당서역기의 기록은 하르샤 당시의 사회‧종교적 상황을 생생히 그려낸다. 불교 사원과 브라만교 사당이 나란히 존재하며, 각각의 신앙이 독특한 건축 양식과 예술로 표현되었다. 이는 하르샤의 통치가 단순히 정치적 안정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융합하여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불교 사원에서는 밤낮으로 노래와 연주가 끊이지 않았고, 이는 사원의 중심 공간에서 수행자들이 사용하는 비파와 북 같은 전통 악기들을 통해 구현되었다. 벽에는 붓다의 삶을 묘사한 섬세한 벽화와 불상들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러한 예술적 표현은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지역 주민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브라만교 사당은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신의 권위를 나타냈다.

하르샤는 관세음보살의 예언에 따라 인도 북부 지역을 통합하고 불교를 보호하는 군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불교를 훼손하려는 적대 세력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냈다. 특히 샤시가 왕과의 대립은 그의 통치가 단순한 권력의 유지가 아니라 종교적 가치를 지키는 투쟁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샤시가라는 이름은 달을 의미하며, 그의 대립은 하르샤의 통치에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왔다. 샤시가는 불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하르샤의 형인 라지아의 죽음과도 연관된 것으로 의심받았다. 이러한 갈등은 하르샤로 하여금 종교적 관용과 정치적 단호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전략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그는 샤시가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동시에,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하르샤가 종교적 포용성을 실현하며, 정치적 안정과 통합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속에서 하르샤의 빛과 어둠을 상징적으로 대조한다. 이는 하르샤가 종교적 상징과 현실적 정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하르샤의 종교적 포용성과 정치적 역량은 그의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그는 비극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고, 종교와 정치를 융합하여 통합과 조화의 길을 제시했다. 이러한 그의 삶과 통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감을 주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넘어,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상향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에서 철학자로

하르샤 왕은 인도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군주다. 그가 통치했던 7세기 초는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하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도 각자 번영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 공존의 모습이 단순히 화합의 결과였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하르샤의 불교적 귀의는 그의 만년에 두드러졌지만, 그의 초기 통치와 종교적 기반은 시바 신앙에 더 가까웠다.

겐지스강 유역에 자리 잡았던 하르샤의 왕국은 다양한 종교적 표현의 장이었다. 하르샤는 수많은 스투파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단순히 불교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고 지역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전략의 일부였다. 스투파는 신앙적 중심지 역할뿐 아니라 학문적 교류와 문화적 통합을 촉진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는 적어도 천 개 이상의 스투파를 세웠다는 전설적인 업적을 남겼다. 물론 이 숫자의 역사적 정확성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는 불교의 물리적 흔적을 통해 하르샤의 신앙적 지향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스투파들은 단순한 종교적 건축물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예배와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지던 장소였다.

힌두교 역시 이 지역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당시 브라만들은 베다 구절을 낭송하며 신들에게 공물을 바쳤고, 시바 신앙의 핵심 의례 중 하나인 시발 링가에 우유나 버터를 붓는 봉헌 행위가 널리 행해졌다. 이러한 의례는 단순히 신에 대한 경배를 넘어, 지역 공동체의 통합을 강화하고 사회적 유대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이러한 행위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의식을 통해 신성함을 공유하고, 집단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로 작용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를 넘어, 신과 인간 간의 관계를 물질적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례는 당시 종교적 삶이 얼마나 깊이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시발 링가 의식은 단순히 신에게 바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신성함을 물리적으로 상징하는 의례로서 공동체의 통합을 강화하는 역할도 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하르샤가 현장 스님과 교류하면서 보인 태도다. 현장은 그의 기록에서 하르샤를 "마하라자"로 표현하며, 그가 주변국의 왕들보다 높은 권위를 지닌 인물로 묘사했다. 하르샤가 현장을 초청했던 일화는 그의 강력한 통치력뿐 아니라, 불교에 대한 그의 관심이 단순한 신앙을 넘어 학문적 호기심과 정치적 목적을 동반했음을 시사한다. 현장은 하르샤와의 만남을 통해 나란다와 같은 불교 학문의 중심지가 하르샤 왕국 내에서 어떻게 보호되고 확장될 수 있는지 논의했으며, 이를 통해 불교의 교리가 하르샤의 정책에 반영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이러한 교류는 하르샤가 주변국과의 정치적 연합을 강화하고, 통합된 종교적 정체성을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교류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한 정치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하르샤와 현장의 만남은 단순한 의례적 접견이 아니었다. 현장이 꼬마라 왕의 초청을 받아 마가다국에서 가마루국으로 이동 중일 때, 하르샤는 직접 사신을 보내 그의 참석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꼬마라 왕과 하르샤 사이의 긴장감이 드러났는데, 이는 당시 각국의 왕들이 얼마나 독립적인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꼬마라 왕이 "내 머리를 가져갈지언정 현장을 보내지 않겠다"고 응수하자, 하르샤는 "그럼 머리를 가져오겠다"고 대응했다. 결국 꼬마라 왕은 하르샤의 권위 앞에 한발 물러섰다. 이는 하르샤의 정치적 위엄과 함께 그가 불교적 가르침을 존중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하르샤는 "무차 대회"라는 행사를 주최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대중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무차 대회는 이름 그대로 차별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법회였다. 이 행사는 불교의 평등 정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르샤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통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무차 대회는 단순히 종교 행사가 아니라, 하르샤가 통치하는 왕국의 다문화적이고 다종교적인 환경을 통합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하르샤는 불치사리(붓다의 치아 사리)를 보관한 보석함을 통해 불교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 보석함은 아침저녁으로 빛이 변하는 신비한 특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국 각지에서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인파는 하르샤의 불교적 후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방문객으로 인해 통행세를 올리는 일화는 당시 종교적 숭배가 경제적 활동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르샤는 또한 문학적 재능도 뛰어난 왕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예술적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당대의 사회적 가치관과 문화적 정서를 반영하며 대중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의 희곡은 인간 관계와 애정의 복잡성을 설화적 요소와 결합하여 전달하며, 당시 사회에서 문학이 가지는 중요한 역할을 재조명했다. 이러한 문학적 활동은 왕실과 대중 사이의 문화적 연결을 강화하고, 하르샤의 통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가 지은 두 편의 희곡은 설화적 요소를 바탕으로 남녀 간의 애정을 중심으로 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불교적 주제와는 거리가 있지만, 당시 왕실 문화와 대중의 정서를 반영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하르샤가 현장을 만난 이후로 불교에 더 가까워졌다는 기록은 그의 신앙적 변화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 통치 전략과도 연결되었음을 암시한다.

하르샤의 개인적 삶 또한 그의 종교적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린 시절 시바 신앙을 중심으로 한 브라만 문화에서 자랐으며, 이로 인해 힌두교의 신성성과 의례적 전통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가족사가 불안정했으며, 이는 그가 다른 신앙에 열려 있는 자세를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장과의 만남은 이러한 열린 태도를 심화시켰으며, 특히 불교의 평등과 자비의 가르침이 그의 통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만년에 불교적 후원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났으며, 그의 정치적 결단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시바 신앙을 중심으로 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현장과의 만남을 통해 불교의 보편적 가르침에 공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종교적 환경의 역동성과 하르샤 개인의 통치 철학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를 단순히 개인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이를 통치의 도구로 활용하며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모색한 것이 하르샤의 독창성이었다.

하르샤, 인도 역사에서 독특한 자리매김을 한 통치자이자 문화 후원자, 그리고 불교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그의 삶을 통해 인도 고대사에서 불교와 힌두교의 상호작용, 그리고 종교와 정치의 복잡한 얽힘을 엿볼 수 있다.

하르샤의 어린 시절은 단순한 왕족의 삶이 아니었다. 그는 철학과 학문에 유난히 관심이 많아, 고대 인도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였던 윤리, 존재론, 그리고 지식론과 같은 문제들을 깊이 탐구했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관심은 그의 주변 환경과 학문적 영향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불교 사상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는 학문과 철학에 열정을 보였고, 이는 동문 수학했던 친구 중 한 사람이 불교 승려가 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지적 환경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여동생 라지아 슈리 역시 독실한 불교 신도로 알려져 있다. 하르샤는 어린 시절부터 불교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이 종교에 대한 이해를 키웠다. 또한 군나라바라는 유명한 스승과의 만남은 그의 불교적 관심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하르샤가 불교를 후원했다는 것은 그의 문학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여러 학자들이 그의 이름과 연관 짓는 불교 찬가 두 가지, 즉 ‘수프라바타’와 ‘아슈타마스타나 짜이디야’가 있다. 수프라바타는 ‘아름다운 새벽’을 뜻하며, 이는 동트는 시간에 어울리는 24개의 긴 계송으로 구성된 찬가이다. 이 찬가에서 새벽은 새로운 시작과 깨달음을 상징하며, 빛이 어둠을 물리치는 장면을 자연적 이미지로 생생히 표현한다. 예를 들어, 찬가에는 ‘태양의 첫 빛이 대지에 내려앉아 생명을 깨운다’는 구절이 있어, 새벽의 순간을 명상적이면서도 경이롭게 묘사한다. 이러한 상징적 언어는 불교적 가르침인 내적 깨달음과 외적 평화의 조화를 노래하고 있다. 이 찬가는 아침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불교적 명상을 결합한 작품으로, 종교적 심성을 자극하는 동시에 예술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반면, 아슈타마스타나 짜이디야는 여덟 곳의 불탑을 찬양하는 짧은 계송이다. 이 작품은 불교 순례지의 신성함과 영적인 감동을 노래하며, 하르샤 시대의 불교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찬가들의 실제 저자가 하르샤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하르샤의 문학적 재능과 불교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하르샤의 문학적 업적 중 가장 주목받는 작품은 산스크리트 희곡 ‘나가난다’이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나가’와 ‘난다’, 즉 ‘뱀과 기쁨’이라는 두 단어의 복합어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나가는 단순히 뱀이 아니라, 인간과 신화적 존재가 결합된 초월적 생명체로 묘사된다. 이들은 물과 가까운 존재로, 신들을 모시거나 지하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영역을 지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나가의 이러한 초월적 속성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 자연과 신성의 조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난다는 기쁨이나 환희를 의미하며, 작품의 줄거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가난다’는 다섯 개의 막으로 구성된 희곡으로, 인도 내에서 상연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북인도와 중인도 지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상연 당시 관객들은 이 작품의 깊이 있는 철학적 메시지와 감동적인 이야기 전개에 큰 찬사를 보냈다. 의정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이 상연될 때마다 관객들은 기립 박수를 보내며 감동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상연이 이루어진 극장들은 항상 만석을 기록하며, 당시 인도의 문화적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의정 스님의 기록에는 이 작품이 인도에서 상연되었다는 사실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을 입증한다. 작품의 주요 줄거리는 승운 보살로 알려진 주인공 지무바하나가 나가 청년 대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 희생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이타심과 자비를 상징적으로 구현한다. 특히, 지무바하나의 선택은 개인적인 이익을 초월해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불교적 이상을 보여준다. 그의 희생은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한 깨달음의 행위로도 해석되며,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기 부정과 집착의 해탈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메시지는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제공하며, 당시의 종교적 가치와 사회적 이상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승운 보살은 단순히 개인적 욕망을 넘어 공동체의 안녕과 희생의 가치를 실현하며, 불교적 이타주의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초기에는 단순히 사랑과 결혼을 다루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희생과 이타주의 주제를 중심으로 한다.

이 작품이 독특한 이유는 힌두교와 불교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품의 초반부 축시에서는 붓다를 찬탄하며, 불교적 색채를 강조한다. 축시는 붓다의 가르침과 자비를 찬양하며, 관객들에게 신성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힌두 여신 가우리이다. 가우리는 순수하고 정숙한 이미지를 가진 여신으로, 힌두 신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가우리는 특히 파르바티 여신의 다양한 측면 중 하나로 해석되며, 작품 속에서 신성함과 인간적 사랑의 조화를 상징한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은 하르샤 시대의 문화적 다양성과 종교적 융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의 전개 방식은 또한 독특하다. 초반부와 후반부의 극적인 대조는 하르샤의 희곡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의 다른 희곡들과 비교해 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고대 인도의 일반적인 희곡들이 주로 신화적 이야기와 유희적 요소에 초점을 맞췄다면, ‘나가난다’는 인간적 갈등과 종교적 이상을 결합하며 더 깊은 감동을 준다. 이러한 특징은 관객들에게 친숙한 주제를 사용하면서도, 불교와 힌두교적 가치관을 동시에 통합하려는 하르샤의 독창성을 드러낸다. 초반부는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만남과 사랑, 결혼에 초점을 맞추며, 인간적 감정과 욕망을 드러낸다. 이는 관객들에게 친숙하고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주인공의 희생과 이타주의가 강조되며, 극의 분위기가 심각하고 철학적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구조는 하르샤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종교적,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가난다’는 단순히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담고 있는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의미도 크다. 희곡은 당시 무대 상연을 염두에 두고 쓰였으며,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난디로 알려진 축시는 이러한 목적을 잘 보여준다. 난디는 관객들, 특히 로열석에 앉은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삽입된 찬탄 구절이다. 이 구절은 붓다에게 보호를 청하는 내용으로, 불교적 신앙을 드러내는 동시에 정치적 안정과 후원을 강조한다. 이러한 문학적 장치는 하르샤가 종교와 정치의 균형을 어떻게 조율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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